- 2007/08/06 라따뚜이, 그 어느 영화보다도 적절한 (14)
- 2007/08/06 평론가좀 까지 말자 (18)
- 2007/08/01 D-WAR, 봐야하나? (17)
- 2007/05/05 무식함을 드러내기 (17)
- 2007/02/26 1번가의 기적, 그리고 비겁한 기적 (14)
- 2006/11/01 플래시백과 ADR, 교훈만 남기네 - 도라지꽃(198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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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관련된 글 6개
라따뚜이, 그 어느 영화보다도 적절한
2007/08/06 19:35

지난 7월 26일 봤던 영화다. (왜 이제서야 쓰시냐고 묻는다면, WORLD situation through ZF’s eye라는 제목이 너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라고 답하겠다.) 이 영화, 재밌었다. 자신있게 추천해드릴 수 있는 수준이다.

Ratatouille(2007), Disney-Pixar
픽사의 가치는 풀-3D 애니메이션 중에서는 당대 최고 수준인 화려한 그래픽에 있지 않다. 스토리 자체에 있는 것도 아니다. 픽사의 거의 모든 영화 줄거리는 한 줄로 요약할 수 있다는 말도 있다. 내가 본 영화만 이야기하면(너무 어렸을때 본 영화는 제외), <몬스터 주식회사>는 “인간 아이의 비명으로 에너지를 연명하며 살지만 인간을 가까이해선 안되는 몬스터들 세계에 우연히 들어온 인간 아이와 그를 돌려보내려 하는 이야기”였고, <니모를 찾아서>는 “물고기 수집가에게 잡혀간 아들을 찾아 떠나는 아버지의 여정”이었고, <인크레더블>은 “퇴역한 슈퍼히어로 미스터 인크레더블 가족이 거대한 음모를 막는 이야기”였으며, <카>는 “잊혀진 국도변 마을에서 레이싱 스타가 느끼는 느림의 아름다움”이었다. 그럼 대체 그들의 가치란 무엇인가? 나는 그들의 가치가 플롯(plot, 줄거리 또는 줄거리의 구성)에 있다고 말하고 싶다. 앞선 픽사의 영화들이 그러했듯, 이 영화는 상영시간 내내 정말 치밀하게 짜여진 구성으로 관객을 즐겁게 한다.

혹시, <인크레더블>을 보셨는가? 이 영화의 감독은 <인크레더블>의 브래드 버드다. 이 영화는 원래 브래드 버드가 아닌 잔 핀카바가 컨셉을 만들었지만, 픽사는 장편 영화 연출 경험이 없던 그에게 감독을 내어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결국 옳은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브래드 버드는 이 이야기를 긴장감을 놓을 수 없다가 결국에는 따뜻해지는, 정말로 “모범적인 이야기”로 만들었다.

이 영화의 그래픽, 훌륭하다. 적절하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이 영화의 그래픽은 영화를 감상하는데 전혀 방해가 되지 않는다. 눈이 즐거운 장면도 적지 않다. 하수도 급류의 속도감 역시 매우 적절했고, 복잡한 식당의 표현 역시 적절했다. 식당의 조리실을 표현하는 장면은 정말이지 ‘(사람만 빼고) 진짜 식당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달까.

여하튼, 이 영화는 어느 영화보다도 ‘누구나 보기에 적절한’ 영화다. <화려한 휴가>와 <디워>의 어마어마한 규모의 와이드 릴리징에 눌려 극장 가서 보기가 쉽진 않을 것 같지만, 이 영화는 그 ‘노력’의 대가 이상을 돌려주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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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F's dream station » This is reality/Culture
평론가좀 까지 말자
2007/08/06 13:11

일반 대중은 영화에 대한 느낌을 말할 뿐이고, 평론가는 영화에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하길 원할 뿐이다. 어차피 정답 없는 세상이고, 둘은 접근 방식이 아예 다른 거지, 서로가 무언가를 놓쳤다고 욕하고 할 게 아니다.
열역학을 보라. 물리 하는 사람과 화학 하는 사람은 접근법이 다르다. 한쪽이 기체라는 것 자체의 일을 계산한다면, 다른 쪽은 주변 계가 하는 일을 계산한다. 그 결과, 두 학파(?)가 계산한 값의 부호는 반대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물리 하는 사람과 화학 하는 사람이 서로를 ‘깔’ 수 있나? 정작 중요한게 뭔지 모르네, 뭘 모르고 계산하고 앉아있네, 이럴 수 있느냔 말이다. 아니다.
하나 예 더 들어야겠다. 식상한 예이긴 한데, (조지 해리슨옹에게는 상당히 죄송하지만....) 비틀즈의 존 레넌과 폴 매카트니. 존 레넌은 사회적인 음악의 정점에 서있던 사람이고, 폴 매카트니는 아름다운 음악을 하려던 사람이다. 존 레넌이 음악성을 놓쳤네, 폴 매카트니 음악은 비었네,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아니다. 정답 없는 세상에서, 양쪽의 길이 정답일 수도 없는 세상에서, 그들은 그저 자기가 하고 싶은 음악에서 최고가 되고자 했을 뿐이다. 둘의 논쟁, ‘팬 진영’의 논쟁은 허무한 것일 뿐이었고 말이다.
여하튼, 평론가좀 까지 말자. 그들이 ‘대중들이란... 쯧쯧’이라 말하기 전까지는 입 닫고 있자. 알고보면, 평론가들도 대단히 솔직한 면이 많은 사람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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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WAR, 봐야하나?
2007/08/01 12:25

나는 솔직히 <D-WAR>를 볼 마음이 없다. 왜냐, 나는 스토리가 살아있는 영화를 좋아하지, 시각적 충격이네 뭐네 이런 건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건 내가 최근 본 영화, 그리고 그 영화에 대한 느낌만 보면 알 수 있을테다.
최근 개봉한 영화 중, 분명 인기있고 추천 들어온 영화는 <트랜스포머>였지만 난 <트랜스포머>가 아니라 <라따뚜이>를 봤다. 그리고 기대 이상으로 만족했다. 왜냐, <라따뚜이>는 스토리가 재미있으니까.
내가 <스파이더맨 3>을 본 이유는 <스파이더맨 2>의 흥미진진한 설정, 예를 들면 “먹고살기 바쁜 슈퍼히어로”라던가, “원하지 않으면 능력을 잃는 슈퍼히어로”라는 설정,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야기’가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파이더맨 3>이 머리는 만족했지만 가슴이 만족하지 못했던 이유는, <스파이더맨 3>에 버무려놓은 수많은 은유들은 흥미로웠지만 이야기의 만듦새는 (아무래도 시간이 제한되어있던 탓인지) 약간 비약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자의로 본 영화는 아닌 <그놈 목소리>, 만족 못 했다. 영화의 기획의도(“그놈 잡자!”)에는 충분히 부합하는 영화였다만, 이야기든 플롯이든, 그런 게 조금 난잡했다. 분명 극영화를 보기로 했는데, 다큐멘터리를 본 느낌이랄까...
결국 오늘은 8월 1일. 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D-WAR>가 개봉하는 날이다. 난 ... 이 영화를 정말이지 보고싶은 마음이 없다. 보고 판단하자고 말하기엔, 내겐 시간이 너무 없다. 나는 <트랜스포머>보다 <라따뚜이>가 좋은 사람이니까.
P.S. 이 영화의 마케팅은 최악이었다. 뭐랄까, 그런 기분만 들었다. 열등감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자기위안하려 하고 있다는 느낌. 영화 팬들도 짜증났다. 음모론, 음모론 ... 말 되는 거 말 안 되는 거 마구 가져다 붙이는 거, 싫다.
하나만 더. 쇼박스, 미쳤나요? 니들이 삼성인가요? 한국에서 광고 끊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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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식함을 드러내기
2007/05/05 11:15

“요새 한국 영화는 볼 영화가 없어. 다 그게 그거야.”
“요새 한국 음악은 들을 만한 음악이 없어. 다 그게 그거야.”
이런 말, 자기가 무식하고 불성실하다는 걸 만방에 드러내기 위해선 딱인 것 같다. 물론, 시장이 ‘좋은’ 인디 영화나, 의미 있는 영화들(천년학... 거장의 100번째 작품이 그런 대우를 받아도 되나 싶다. 이거 말고도 많다.)을 1주일만에 내리는 것도, 그리고 공중파에서는 몇몇 의미있는 라디오 프로그램이 아닌 이상 인디 음악이나 좋은 음악이 아닌 스타 위주의 음악만 던져주다보니 사람들이 좋은 음악에 ‘접근’하기 더 힘들어진 건 맞는 소리다. 하지만, ‘다 그게 그거’라는 말은, 정말 노력하는 아티스트들에 대한 모욕이다.
P.S. 이적 3집 (나무로 만든 노래) 좋다. 13000원의 행복이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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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번가의 기적, 그리고 비겁한 기적
2007/02/26 19:21

어제, (혼자) <1번가의 기적>을 보고 왔다. 메가박스 2관, 나쁘지 않았던 자리, 다만 앞과 왼쪽, 그리고 오른쪽의 다정한 연인들 사이였던 자리에서.
스토리 진행이나, 전체적인 면은 괜찮은 편이었으나, ‘옴니버스’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물론 이 영화는 ‘강풀 만화’가 아니므로 전혀 별개인 것 같았던 이야기가 스리슬쩍 묶이는 그런 감동(난 아직도 <순정만화>의 묘한 매력을 강풀 만화 최고의 매력으로 꼽는다)을 기대하는 게 잘못일 수도 있겠다만, 이 영화는 나쁘게 말하면 ‘달동네 옴니버스 영화’가 돼버린다.
전체적인 스토리 구조가 매우 익숙하다. 재미있게 나가다 한 순간에 틀어지고, 슬퍼지고. 좋게 말하면 무난하고, 나쁘게 말하면 식상한 구조. 요즘 영화를 ‘자주’ 감상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권장할 법하지만, 요즘 영화를 ‘자주’ 감상하는 사람들은 그저 그런 영화다-라 생각할 법하다.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내용을 아셔도 상관이 없으시다면, 마우스로 긁어서 읽어주세요.)
내용은... 말하자면, 달동네 아이들 이야기, 러브스토리, 그리고 복싱 이야기의 조합이다.
이 영화의 3분의 1은 식상하다. 러브스토리는, 정말 예측 가능한 스토리, 그대로 흘러갔다. 자신의 가난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슬퍼하는 선주, 그런 선주를 이해하고 결국에는 사랑을 이뤄내는 ‘정수기 아저씨’의 이야기는 정말 ‘어디선가 봤다’란 느낌이었다.
또 하나의 3분의 1, 복싱 이야기도, 흔한 스토리였다. 물론 내 세대는 <록키>를 본 세대는 아니라, 익숙한 스토리로 다가오진 않았다. 하지만 줄거리는, 거의 <록키 1>의 복사판이다. 정말이다. “애드리안”을 외치듯이 “명란”을 외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경기와 동시에 세상을 떠나는 아버지가 말하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으로서의 챔피언의 가치가 있다. 정말 무난한 스토리였다.
하지만 이 영화의 가치는 마지막 3분의 1, 달동네 이야기에 있다. 따뜻했다. 그리고 슬퍼졌다. 이 영화가 <색즉시공>, <낭만자객>의 윤제균 감독의 영화-라는 점에서 으레 기대되던, ‘코미디 영화’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달동네 이야기는 유머가, 조금 남아있었다.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를 철거당하는 집 앞에서 부르는 그 아이들의 슬픔이란. 신파처럼 끌고 나가다, 그 신파를 뒤집으며 결국엔 ‘비행’에 반쯤 성공하는 그 ‘기적’.
어쨌든, 전체적인 인상이 나쁘진 않은 영화였다.
하지만 마지막 3분 정도가 그 모든 인상을 망쳐버렸다. 정말 뜬금 없었다. 아무리 “1번가의 기적”을 외쳐도, 이건 “비겁한 기적”이다. 아니면 “기적”을 절실히 바랬던 감독의 실수다. ‘그 이후’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영화가 아니란 점에선 칭찬해줄 법하지만, 도망갔다던 엄마가 돌아와, 토마토 농장에서 마음껏 토마토를 따먹는 아이들, 정말 그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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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시백과 ADR, 교훈만 남기네 - 도라지꽃(1987)
2006/11/01 20:05

div style=padding: 10px; background-color: rgb(228, 228, 228);학교 수행평가용으로 낸 글인데, 한 번 올려봅니다. lt;도라지꽃gt;이라는 영화 감상문인데, 영화 내용 아시는 분은 드물 것 같아서; 북한 영화니까요. a href=http://www.google.co.kr/search?q=%EB%B6%81%ED%95%9C+%EB%8F%84%EB%9D%BC%EC%A7%80%EA%BD%83amp;ie=utf-8amp;oe=utf-8amp;rls=org.mozilla:ko:officialamp;client=firefox구글 검색 결과가 쓸만하니 참고하시면 괜찮을 듯싶습니다./a/divbr /span style=font-weight: bold;br /1./spanbr /br /플래시백. ‘회상’이라고는 번역하기는 약간 힘들고, 과거의 사건을 중간에 삽입하는 기법을 말한다. 많은 영화, 많은 드라마가 플래시백을 사용한다. 과거를 넘나드는데다 단순 회상이 아니라서 객관적인 시점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br /br /이 영화(아직 북쪽 영화라는 ‘딱지’는 붙이지 않겠다. 그럼 이야기가 재미 없어지니까.), lt;도라지꽃gt;(1987)도 플래시백을 많이 사용한다. 하기야, 이야기를 맨 처음부터 끝까지, 시간 순서대로만 가면 이야기가 얼마나 재미없겠느냐만은 플래시백은 a href=http://www.cine21.com/Magazine/mag_pub_view.php?mm=005003005amp;mag_id=41873lt;씨네21gt; 남동철 편집장(573호)의 말/a처럼 “예쁜 칼”이다. 입체적인 구성의 영화에서 “가장 쉽고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플래시백인 반면, 이젠 플래시백은 워낙 많이 쓰여 식상하기까지 하다. 게다가 플래시백은 “세상 모든 일을 원인과 결과로 단순화”해버릴 위험까지 있다. 몇몇 영화들은 이를 세련된 방식으로 다듬어 잘 이용하고 있지만, 그런 깊은 생각까지 하기엔 이 영화는 너무 일찍(1987년 영화니까) 나온 걸까.br /br /이 영화는 플래시백을 대단히 많이 쓰고 있다. 마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lt;뇌gt;와 같이. 하지만 베르베르의 플래시백 구조가 이중나선처럼 꼬여있다 소설의 끝에 가까워가서야 만나는 흥미로운 구조가 아닌, 첫 번째 플래시백에서 이미 ‘현재’와 만나버리는 재미 없는 플래시백이다. (물론, lt;우리들의 행복한 시간gt;의 플래시백이 눈물을 불러오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듯, 이러한 효과를 노렸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br /br /br /span style=font-weight: bold;2./spanbr /br /이 영화는 ‘들어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듯, ADR(Automated Dialog Replacement; 후시녹음방식)의 흔적이 역력하다. 80년대의 기술적인 한계일까. 한계든 아니든, ADR은 위험하다. 보다 안정적인 사운드를 얻거나, 아니면 현장감을 극도로 잃거나. 이 둘 중 하나다. 영화 중간에 등장하는 노래들이 안정적인 소리를 들려주는 건 좋지만, 이 영화는 전체적으로 현장감이 없다. 생각해보라. (물론 번역 문제도 있지만) 당신은 외국 영화를 볼 때, 자막으로 된 영화를 보겠는가, 아니면 자막이 아닌 더빙된 영화를 보겠는가? 아마 자막을 택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이유는, 현장감 때문.br /br /br /span style=font-weight: bold;3./spanbr /br /이 영화, 흥미를 버렸을 뿐만 아니라, 현장감마저 버렸다. 왜일까. 왜 이런 짓을 한걸까. 답은 명료하다. 이 영화는 통속영화가 아니라 예술영화다. 사상도 담겼다. 의도적으로 ‘고향에 남아 발전을 도우면 영웅이 되고 그렇지 못하면 모두에게 버림받는다’는 교훈을 강조한다. 나머지는 쓸모 없다는 거다. 대사에서나, 여러 장면에서나. 그리고 ‘도망자’의 아들은 용서를 빈다. 우리에겐 너무나도 익숙한 구조다. 하지만 이 영화는 조금 다르다. 마지막 장면에서 말이다.br /br /마지막 장면. 매우 대조적이다. 고향의 발전을 위해 죽어 영웅이 된 한 사람(진송림), 그리고 고향을 버렸다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한 사람(박원봉)과 그의 아들(박세룡). 둘은 (각자 다른 곳에서) 무릎 꿇고, ‘눈물로’ 용서를 빈다. 우리에겐 용서하는 것으로 끝맺는 장면이 익숙하나, 이 영화는 그렇지 않다. 일종의 열린 결말, 혹은 용서의 미완결이다. 왜일까. 이쯤에서 북쪽 이야기를 꺼내는 게 적절하겠다.br /br /여기서 잠깐. 진송림이 무엇이 되었는가. “영웅”이다. 1980년대는 북쪽에서 “숨은 영웅”을 찾는 데 많은 관심을 쏟았던 때다. 왜 그럴까. 자본주의가 이용(혹은 악용)한 인간의 (못된) 본성은 이기심이다. 남보다 자기가 잘 되어야 한다.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프다(원래는 사촌이 땅을 사면 퇴비를 주기 위해 배가 아프다는 소리였지만, 요새는 알다시피 그 뜻이 아니다.). 하지만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는 그와 배치된다. 그래서 끊임없이 ‘당근’을 준다. 그게 바로 영웅 칭호다.br /br /이 ‘예술영화’는 뜯어보면 대단히 교훈적이다. 공산주의에 심하게 반감을 가진 사람이 보면 프로파간다(정치적 선동)로 볼 가능성, 크다. 하지만 공산주의 영화라는 편견을 벗고 보면 ‘프로파간다’라 볼 만큼 심하게 선동적이진 않다. 다만 ‘교훈’을 녹여냈을 뿐. 이러한 영화는 남쪽에도 많이 있지 않나. 왜. 70년대엔 ‘건전가요’라 해서 ‘아름다운 대한민국’ 찬양하는 노래도 강제했는걸.br /br /br /span style=font-weight: bold;덧붙여./span 이 교훈을 잘 녹여내서였을까. 이 영화는 비동맹영화제에서 최우수상을 받는다. 이러한 형식의 교훈적 영화가 북쪽에서 많이 제작되고, 장려되는 이유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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